나와 너- -Martin Buber(마르틴 부버)-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
내가 그를 너로 대한다면 그는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따지다 보면 전체적 조화는 깨지고 모두가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현재란 저가 현존할 때에 가능해 진다.
실재적인 것은 현재를 사는 것이고 대상적인 것은 과거만을 산다.
사랑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부분밖에 보지 못할 때의 사랑과 미움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어쩌면 무관심보다는 미워하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사람은 너를 통해서만 나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발전도 가능해 진다.
나와 너가 아닌 그것과의 관계에서는 독점하려는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
원래 독점의 감정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독점이란 너 이외의 모든 것은 깡그리 배경으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정신도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며
숨 쉬고 있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관계를 알고 자신의 현재에 대해 알때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만이 자유인이다.
자유인만이 너라는 상대의 면전에 다가 설 수 있다.
운명과 자유는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
운명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성취이다.
하늘의 길이요 나의 길인 디케(Dike)와 합일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날엔 무엇을 해도 어깨가 무겁다.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숙명을 믿는 일이다.
숙명에 속박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의욕 할 수 있는 것을 의욕 했을 때 운명과 만날 수 있다.
자유인이 운명을 믿는다는 뜻은 자발적인 만남을 갖는다 는 의미다.
아집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자기 안의 격한 욕망만 있을 뿐이다.
나와 참나 사이는 다르다.
인격과 다른 인격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현존 적 존재가 된다.
그리고 현실적 나눔이 풍요 하면 할수록 나는 더 현존 적 존재가 된다.
사람은 순수할 수 없으며 완전한 현실 또는 완전한 비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이중적이다. 그러나 사람은 인격에 의하여 인간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각자의 자아에 의하여 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이 양극의 사이에 있는 터전에서 결정된다.
고립하려는 것은 보편적 정신이 타락한 증거다.
버려야 할 것은 나가 아니라 본능이다.
무한대의 욕심을 일으키는 본능은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원 자인 너와 더불어 순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너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린다가 아니라 도리어 너를 통하여서 모든 것을 본다는 의미다.
그것은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계를 그의 참 기초
위에 놓는 것이다.
완전한 동이 완전한 정으로 바뀌는 것은 온몸과 마음을 기울인 행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이를 무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나님이 깃들어 있는 세계에서 그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차라리 늘 가고 있는 자기의 길이 올바른 길이기를 염원하는 것이 낫다.
모든 관계가 영원 자로서의 너와의 관계일 수는 없으며 다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그러나 결코 찾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길을 간다.
기도로써 나와 너의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에로스는 관계의 일체화가 아니다.
단지 둘을 굳게 얽어매는 관계의 힘뿐이다.
대아를 발견 하려 했던 인드라는 깊이 잠들어 아무 꿈도 꾸지 않게 된 상태,
그것이 바로 대아요 불사요 불구요 그리고 보편이라고 깨달았다.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현실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사랑하거나 정신적으로 얼싸안았을 때의
두 손은 세계를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인간 존재의 참 의미란 삶에 대한 어떤 예견도 예고도 예정도
없는 생존의 이율배반을 끊임없이 살아가는 데에 있다.
자유와 필연의 철학적 모순을 칸트는 필연은 현상의 세계에 속하고 자유는
실재의 세계에 속한다고 했지만 화해할 수 없는 두 명제는 나눌 수도 없다.
오직 그 두 개의 명제를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로 이를 살아 내는 것밖에 그 둘의 통일은 없다.
현실과 존재와의 관계는 변화하기 쉬우며
운명은 숭고한 비애로 가득 차 있게 된다.
너는 나에게서 쉽게 물체인 '그것'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사랑은 오래 머물지 못하며 현실에서 가능할 때 까지만 계속된다.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독존 성이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인 독존성과 포괄성이 같이 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참된 관계는 개별화에 기초하고 있다.
창조는 방출하는 동시에 억류하며 방임하면서 동시에 구속한다.
만물의 이중적인 이 근원적 모순 앞에서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관계의 세계를 이룩하는 영역 세 가지
자연과 어울리고 사람과 어울리며 정신적 실재와 어울리는 삶이다.
우리는 이 관계에서 영원 자인 '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영역은 다 영원 자인 너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영원 자 너는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형상의 말 없는 물음, 사람의 속삭임, 그리고 만유의 무언의
계시가 현존하는 말씀으로 인도하는 관문이 되어 준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언어로 화하여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다.
동로마제국의 신비사상가 시메온은 고독한 하나님이여
고독한 나에게로 오소서! 라고 외쳤다.
고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는 고독에 치른 대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물에 대한 체험과 이념을 단념하는 것이라면 필요한 것이다.
모든 관계의 단절은 사람을 이용가치로만 여길 때의 결과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현실과 사람의 현실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고독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눈다면 '지성소'와 '요새'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지성소에 있다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체험이다.
요새는 자신의 혼을 즐기려는 독백의 장소이며 정신적 유희의 장소다.
어느 현대 철학자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상은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 국가, 권력, 금전 등등으로서
사회생활에는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관념이 얽혀 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공동체와 나와 너의 관계를 모르는 인간 단위의 집단이다.
관계란 바다로 흘러가는 모든 강물이 하나의 물인 것처럼 광대무변한
보편성이다. 바다와 강의 경계선이란 나에게서 너에게로의 흐름이다.
세계가 하나의 수익수단으로만 존재한다면 하나님도 자신의 이익수단이 된다.
이익의 수단인 기도는 자기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 보려는 부질없는 방편이다.
종교적이라함은 도덕적 판단을 철저하게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 세계의 온갖 사건을 사랑으로 싸안는다는 커다란 책임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의 입장에서 본 악인은 벌을 받아야만 할 악인이 아니라 종교적
인간에게 더 깊은 책임을 느끼게 하는 사랑을 받아야할 인간인 것이다.
현존의 권능을 받아들일 때 의미는 모조리 실현된다.
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인생에 의미란 없는 것이 된다.
그런 의의를 밝힐 수 있는 공식이나 도식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인식보다도 더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우리들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에 의하여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의미는 체험되기를 바라지 않고 실현되기를 바란다.
사람의 창조영역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 분의 형상을 우리가 분리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참된 기도에는 신앙과 제의가 하나가 되어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너라고 부르고자 할 때는 거짓된 안전을 버리고
현실을 지향하는 무한한 모험을 감행하여야 한다.
대가람의 장식에 현혹되어 궁창의 신비를 잊어버린 사회를 박차고 나와
궁극적 고독에 돌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 내가 직접 교섭하는 생활은 유일한 현실적 객관적 생활이다.
우리의 주관주의는 공허한 하나님을 만들고
객관주의는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든다.
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이중적 구조가 없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이중성이 잠복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치료도 교육도 상대자의 처지를 생활로써 체험하는 동시에 상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내가 실존의 의미와 실존의 바탕을 하나의 상호성으로 유지하고 있을 때
비로소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가능한 상호성도 가능해 진다.
부버의 사상
사람이란 무한히 고독한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만남에 대한 애끓는 향수가 있다.
오늘의 문제는 사람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생활다운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이른바 유일자와 그 소유 - 즉 주관과 그 대상- 는 있으나 고독 자와
고독 자의 제휴 -즉 주체와 주체의 인격적 교류 - 는 없다.고 했다.
조직체로서의 사회만 있고 인격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색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너를 통하여서 나는 나가 된다.
지금 우리들에게 만남은 없고 서로에게 "그것"만 있다.
거기에는 만난다는 것 대신에 가진다는 것 만이 있게 된다.
나와 그것이 되었을 때에는 이용과 체험의 대상이 될 뿐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배하고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적 존재마저도 체험과 이용의 대상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비인간화하고 비 인격 시 하고 있다.
인생 문제 해결 상의 한계점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하나의 선물이요 동시에 과제이다.
위대함에 이른다는 것은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키에르 케고르" 는 말했다.
부르심에 임한다는 것은 자기의 전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과 세계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만이 자유인이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는 악의 난무도 막을 길이 없다.
악의 존재 역시 궁극적으로 해답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부버의 하나님은 우리가 대화의 삶을 결단할 때 영원 자 너의 모습으로
만나 주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란 우리가 사상으로 추리할 수는 없어도
나보다도 더 나에게 가까우신 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이며 우리는 다만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그러므로 박식한 사람에게는 난해하다는 이 작품이 풍부한 인간적 경험을
가진 상식적 지성에게는 잘 이해된다는 데에 이 책의 묘미가 있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