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철학 에세이
인생의 행복 중 현재의 행복을 최고로 꼽는 "에픽테토스"(로마 제정기의
스토아학파 ) 또한 진리이며 향락의 허무를 인식하고 수고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종교적 관점 또한 진리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유일한 생존 목적이라 여기는 나의 주장 역시 진리다.
낙관주의는 자연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의 본질 중에는 낙관주의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외부세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식의 단순한 장식품이며 우연적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이들 일체의
존재가 곧 자아이며 자아를 제외하면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내가 만든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명구- 조명주의- 신비주의적 발상.
철학의 대상은 일반적인 경험이다. 즉 경험 그 자체이다. 인식은 지성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모든 철학은 인식능력과 인식능력의 형식 그리고 그 형식의 법칙을 검토
하고 그 타당성과 한계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된다. 안경이라는 형식과 안경의 색상이라는
본성에 따라 사물의 크기 및 색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개인의 인식능력과 본성에 의해 동일한
현상이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서로 연관될 때만이 이해될 수 있고 그 결과 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형이상학은 자연의 형이상학, 아름다움의 형이상학, 도덕의 형이상학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합리적 심리학 다시 말해 정신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칸트가 증명한 것처럼 정신이라는 일종의 현상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가설이며 따라서 이증명 또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지식과 별개인 이해력과 판단력의 지적 융통성이 부족한 지성인과 일반대중은 동일한 종족이다.
세상에 토론에 적합한 인물은 거의 없으며 이들과 논쟁을 벌여 원하는 결과를 얻기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폭력뿐이다.
토론을 통해 밝혀지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 정신의 도피처인가이다.
토론에 임하는 상대방의 주장에서 편협한 시각이 엿보인다면 그 즉시 대화를 중단해야 한다.
상대방이 제시하는 정당한 주장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박약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시인하는 것과 같다. 진리가 대중의 저항을 받는 이유는 진리가 지적 능력이
일반인 보다 뛰어난 몇몇 소수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명제를 지켜내기 위한 사투로서 여러 가지 수법을 사용해야할 경우도 있다.
의지라는 가면을 쓰고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인간은 어긋난 양심의 길에서 돌아오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지성-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수한 정신의 낙원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사유란 어떤 이론적 혹은 실천적 현상에 대해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2,3일 정도 지속하다가 그 현상이 어떤 이유를 통해 현실화 되었으며 또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어떤 테마에 대해 간단히 글을 쓴 후 이 경험을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테마를 더욱 명확히 표현하는 추상력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 사유는 이처럼 갑작스럽게 의식 밖으로 뛰쳐나온다.
마치 영감처럼 갑작스러운 현상이며 판단의 형식까지 갖추고 있다.
인간의 의식적인 사유는 두뇌의 표면에서 진행되며 무의식적인 사유는 골수의
본질에서 진행된다는 생리학적 견해 역시 철학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감정의 변화에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적 본능이 숨어 있다.
물질이 소멸하지 않고 단지 형태를 바꿔 여러 모양으로 변화된다는 인식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온전하고 확신할 수 있다.
카이사르도 죽어 흙이 되었고 지금은 어쩌면 벽의 구멍을 막는 바람막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그 흙은 이제 모진 겨울 바람을 막는 흙벽 되었구나.- 세익스피어의 햄릿 5장1절.-
이 세상 대부분의 어리석은 인간들에게는 판단력과 고유한 사상을 만들어내는 개성이 없다.
이들은 정작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고 있기에 존재로 인한 슬픔이나 인간을 괴롭게
하는 자기혐오마저 찾아 볼 수 없다. 이 세상에 시와 철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렇듯 어리석은
군중에게 지혜로운 관을 덧씌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기에 문학과 사상이 참담한
대접을 받지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타인에게 한 발짝 내 딛을 때마다 한 번의 절망을 체감한다.
바보도 자신의 집에 대해서는 처음 방문한 현자보다 더 잘 안다. -스페인 속담-
그러나 어리석은 군중들 개개인 에게는 특정분야의 고유한 경험과 지식이 있으며 그들의 지식이
일반화되기도 한다. 밭의 퇴비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라고 퇴비로 간주할 수는 없다.
모든 악기는 자체의 진동으로 공기의 진동을 유발하고 이로써 존재하지 않는 음을 만들어 낸다.
음으로 모든 악기의 차이점이 구별되지만 첨가 음이 가장 덜한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순수할 것이다.
개인의 특수성과 섞이지 않은 지성은 없다. 인식의 주체인 인간은 어떤 경우든 의지가 선험하지
않는 한 지성에 의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즉 객관적이고 순수한 정신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의지와 지성을 구별하지 못한다. 의지의 주체와 지성의 주체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안에서 의지가 생성된 후 이를 만족시키고자 지성이 활동하게 된다.
지성의 본질은 약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도 심하게 요동치는 작은 불꽃(감정의 기복)과 같다.
즉 주체인 내가 느끼는 감정의 기복이 심할수록 지성은 인식의 충직한 친구로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정의 동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경우에만 중립적인 가치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동요되면 지성은 의지의 지배를 받게되어 가치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올바른 판단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중립적이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식의 소재, 즉 사태와 주체의 관계가 얼마나 중립적인가에 달려 있다.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들은 시대적 정신에 결코 구속받지 않는다.
장구한 역사의 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줄거리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닌 살아 있는 생명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철학을 통해 만들어진 욕망에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거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숨 쉬고 욕망하고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먼 훗날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식물은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식물이
원하는 기쁨은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주관적이며 무감각적인 안식이다.
동물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인식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동물에게도 직관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해 사유할 수는 없다.
인식이란 나와 타자 그리고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구별하는 기준이다.
인식은 세계와 나의 대화이다. 그런데 내가 세계를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며 결국 동물과 비슷한 수준의 인식체계에 머물게 된다.
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때야 말로 인식이 비로소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지성을 욕망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사명을 위해 목숨마저 내 놓는 자들은 영혼의 귀족들이다.
지성이 표출되는 중간과정이 없는 일반인들은 대략적으로 파악한다.
천재의 경우 그 과정에 수많은 반성과 고찰이 뒤따른다. 그 대신 표면 즉 현상적인 부분을
놓치게 되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중국식 장기로 승패를 가를 때 승리하는 쪽은 천재가
아니라 범부인 경우가 많다. 지성의 순수한 활동은 개인적인 흥미가 아니라 객관적인 고찰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 반드시 우선하는 전제다.
대화에서도 욕망에 관계없이 순수한 입장에서만 서로의 의견을 교한할 수 있게 된다.
지성은 어디까지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신활동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이다.
인간들은 지성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 외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태에 대한 관심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지성에서 미소를 끌어내는
방법은 비천한 몸짓과 익살뿐이며 그런 인간은 고민하는 짐승이다.
주관적인 지성 소유자들에게 유일한 오락은 도박이다. 야생의 본능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의지만 계속 공급될 수 있다면 죽는 날까지 도박의 굴레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각적인 자극 외에는 그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없다.
정신적인 성숙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화는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교묘한 형식미와
조화가 뛰어난 재질이 엿보인다.
이에 반해 일반인의 대화는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걸음을 떼는 무모한 행진처럼 보인다.
천재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을 선택하고 극단적으로는 삶의 목적
으로 여기게도 된다. 반면에 생존의 문제는 부차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격하해 버린다.
즉 천재들은 삶의 모습부터 가치관까지 일반인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정치처럼 선제 공격만이 유일한 생존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세계에서 천재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치가는 주관적 의지가 최고조에 달해야만 활동이 가능해진다.
즉 최고조에 달한 지성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의지의 힘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는 인간의 본성은 대담함과 강인한 생존 욕구이다.
만약 이 같은 본성에 약간의 지혜와 정확한 판단력과 능숙한 기술이 더해지면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치가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정신상태가 낮을수록 의지에 대한 봉사는 더욱 충실해진다. 지성의 여유분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
즉 의지에 충분히 봉사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지성의 소유자를 가리켜 천재로 명명한다.
지능의 등급을 측정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지능이 어떤 사물을 파악할 때 단순히 개체로 파악
하는가 보편적으로 파악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개체를 파악할 때 우선 보편적인 개념으로
전환시키며 이런 개념을 다시 인식하고자 이성을 활용한다.
인간의 이같은 파악이 직관적인 인식으로 발전하게 되면 다시 말해 관찰된 어떤 사물을 그 즉시
기존의 어떤 인식과 대치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플라톤이 추구하던 인식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플루트라든지 바이올린이 아무리 4옥타브를 연주해 내더라도 인간의 흉부에서 울려 퍼지는
2옥타브의 감동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이런 차이가 천재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천재들에게서 발견되는 두 개의 지성은 인간의 본능인
의지에 대한 봉사를 거부한다. 때문에 천재들의 실천적인 생활능력이 매우 조잡한 수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외로운 나무다.
이 고독한 문양에 한 줄의 글귀를 더하고자 한다면 내가 이토록 찢기는 동안에도 저들은
익었고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열매를 맺었다.
지적인 생활은 발효과정에서 비롯되는 진한 향기처럼 세속적인 생활 즉 인간의 본래적인 의지를
통해 수행되는 실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사와 더불어 철학과 예술의 역사 또한
굶주린 피에 물들지 않고 도도한 그 흐름을 유지 하는 것이다.
천재와 일반인의 차이점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양적인 차이다.
동일한 원인에 대한 각 개인의 사유 결과가 동일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양적인 차이를
질적인 차이로 둔갑시켜버리는 것이다.
양적으로 동등한 두뇌는 질적으로 동등한 사유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일반인의 두뇌는
시대와 상관없이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정량제이다. 때문에 역사를 통해 대중의 주장과
요구는 끊임없이 같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위대한 선구자의 사상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항상
대중의 핍박에 시달렸다. 이유는 태초부터 인간은 거의 동일한 무게의 두뇌를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동일한 반응 동일한 요구 동일한 감정으로 요구 하는 것이다.
천재는 우리 안에 갇힌 토끼와 같다.
토끼는 죽어서야 비로소 요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천재들을 살해한 후 그들이 남긴
업적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동시대에 인정받을 수 없는 외로운 삶을 살면서 시대에 필요한 내
노력도 나의 것은 아니며 내가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이 만족하는 것은 사람들의 찬사가 아니라 자신이 해 낼 수 있었다는 성취감이다.
인간 고유의 유전병인 나태와 태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사상은 자신의 사상을 갖지 않은 자에겐 무용지물이다. -라브뤼예르-
가이우스는 위대한 사람이었다와 가이우스는 미쳐버렸다는 말은 같은 의미다.
둘 다 우리와 같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자기 비하를 하는 겸손한 천재는 천재가 아니다.
동시대인에 대한 오만과 불손 없이는 위대한 성과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없다.
천재의 생애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와의 갈등이다.
조용한 곳에서 대중의 방해를 피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조용한 환경만 제공된다면 이들은 자신의 시대에 만족할 것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주관적인 의지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다.
그렇기에 천재의 경우 오히려 극도로 궁핍한 환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보상심리다. 그리고 궁핍한 환경에는 시간의 자유가 있다.
정신적인 노력을 즐기는 유일한 집단은 오직 천재뿐이다.
지적인 여유를 찾아 볼 수 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일찍 포기하는 편이 낫다.
경험담과 자신의 전문분야 외에는 아무런 화젯거리도 없으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적의를 내뿜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벨타사르 그라시안-
참된 인간을 이웃으로 삼는 것과 외모만 인간인 자들을 이웃으로 삼는 것은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만큼 중요하다. - 조르다노 브루노도 -
민중은 다만 인간처럼 보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인 민중을 만나보지 못했다. -쿠랄의 주장 -
지금 누군가 기분전환을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거나 고독한 인생의 지루함
때문에 친구를 찾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개를 추천할 것이다.
개는 인간보다 의리가 있고 지적인 면에서는 인간과 비슷하다.
우리가 친구를 통해 기대하는 만족은 개를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인간에게는 무능함과 분별없는 욕망이 난무하며 짐승을 경멸하면서도 짐승보다 더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또 한 편으로는 인류의 장점에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은 유익하고
아름다운 예술과 학문을 완성했으며 또 그 근원을 파악하는 성과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짐승에게는 없는 충실한 끈기로 호머와 플라톤을 지난 수천 년 동안 간직해 왔다.
천재의 삶은 자연이 그를 창조한 후 결국 깨뜨려버렸다.
그러나 깨뜨리는 순간 가장 완벽한 자연이 탄생했다. - 아리스토텔레스 -
파우스트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그 무한한 욕망과 다른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고찰이다.
재능있는 인물이 일을 하는 까닭은 돈과 명예 때문이다. 그러나 천재를 활동하게 만드는
동기는 그리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풍요가 천재에게 활동의 빌미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연은 필요치 않은 것을 만들지 않고 또 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만들지도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규명될 수 있는가..
인간이 생존하는 목적은 실천이지 이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원에 속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일 뿐 인식은 아니다.
따라서 행위를 이끌고 의지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자 지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천재들도 지성의 잉여 때문에 실존의 목적이 방해받는 경우가 많다.
그로인해 내면적으로는 행복할지 몰라도 생활은 불행으로 점철된다.
인간의 인식은 사물이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는가를 파악하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파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물과 세계에 대해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현상 즉 표면뿐이다.
세계는 감상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로 이루어진다.
현상에 대한 지식은 일종의 자연과학에 속한다.
여기에 어떤 가설이 제기되면 형이상학적 테마가 된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현상인 동시에 물자체이다.
자연학적 설명은 언제나 원인에서 시작되는 설명이다.
형이상학적 설명은 언제나 의지에서 시작되는 설명이다.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성질은 무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실존 자체를 철학의 목적이자 궁극적인 진리로 삼았다.
동시대의 관념만을 인정하는 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표상에 주목했다.
칸트처럼 인식에 매몰되기 보다는 인식을 좌우하는 인간의 표상과 형태에 천착했다.
철학이 인간의 관념에 묻혀 인식의 본질인 인간을 지워버리는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바라보며 절망했다. 그는 철학자가 아닌 장사꾼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자신의 근본에
절망했고 어머니가 죽은 아버지를 그토록 쉽게 잊어버리는 것을 보곤 사랑의 부질
없음에 절망했으며 세상이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 속에서 절망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러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더욱 절망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절망의 철학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염세는 흔히 말하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염세가 아니다.
한 시대의 탄생을 위해 현시대가 스스로 소멸을 선택하는 희생적인 비관이었다.
삶은 끝없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즉 현재의 나가 아닌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철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욕망을 표상하는 의지의 발현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철학은 인간의 삶과 세계가 특정한 원리나 전제에 의해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세계의 현사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