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밀란 쿤데라 -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다.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만 자신이 남겨놓은
불멸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고독
그것은 관심의 부재다.
그의 사랑을 그녀는 슬픔으로 느낀다.
인류의 구원은 어떤 구체적인 사랑만이 답이다.
침실 그것은 결혼의 제단이며 서로 희생해야만 하는 곳이다.
심지어 잠들 수 없어 하는 뒤척임마저도 금지 되는 곳이다.
오늘날의 정치는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고
통제 불가능한 자체 메커니즘의 논리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영예의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도 당신은 그들을 모른다.
랭보의 슬로건을 위해서는 랭보의 시구를 배반할 줄 알아야 한다.
현재의 안락과, 시장과 광고의 세계, 멜로드라마로 가득한 어리석은
대중문화와 아버지의 세계를 거부해야 한다.
연상인 여자와의 사랑은 보다 은밀해야 하며 둘만의 세계를
대중으로부터 동떨어진 호화 별장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면서도 그녀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그런 사실을 잊고 있을 때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
엉뚱한 행동과 분별없는 말들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독점한다거나 자신의 많은 경험을 자랑해서도 안 된다.
모든 신나는 일엔 언제나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의 생각은 늘 어디엔가 가 있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 속에 살아 있다는 것 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니겠는가.
죽음
쇠한 기력과 견디기 힘든 피로가 삶을 앗아간다.
피로, 그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침묵의 다리다.
너무도 가까이 온 죽음은 두렵다 못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워진다
예전에 느끼던 그런 죽음이 아니며 죽음자체도 보이지 않게 된다.
애거사 크리스트는 죽음이라는 살인을 오락으로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 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레닌이 좋아했다는 베토벤의 열정, 실제로 그가 좋아한 실체란 무엇일까..
기자란 질문이 적힌 수첩을 들고 다니며 겸손하게 설문 조사나 하는
그런 리포터가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어야 한다.
질문을 던질 권리가 아니라 대답을 요구할 권리다.
무기나 음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질문의 힘으로 권좌에서
몰아낼 유일한 새로운 권력이 기자다.
정치가는 기자의 손에 달려 있고 기자는 "이마 골로그"들에게 달려있다.
그들은 확신과 원칙의 인간이다.
이마골로기 (imagology) 란 이미지학으로서 더 이상 논리적
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감성적인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표현으로서 현실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
여론조사는 이마골로기 권력의 완벽한 도구역할을 한다.
여론 조사는 진실이 되어 버렸다.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사랑
사랑은 여전히 인간의 요소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무죄로 만든다.
사랑의 감정은 상대를 안다는 환상으로 우리를 속인다.
나는 모호성의 기법 없이는 진정한 성애도 없다고 단언한다.
성애는 모호할수록 더욱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의 의사역할을 핑계로 상대의 옷을 쉽게 벗긴다.
이 상황의 '성적 전하' 는 신비스러울 만큼이나 크다.
사람들은 모두 언급을 꺼려하는 어떤 신비로운 흥분상태를 원한다.
암묵적 동의하에서는 더욱 더 자극적이고 중독성을 띄기도 한다.
사랑을 하는 이는 누군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랑에는 본질적이며 삶을 운명으로 바꿔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랑 저 너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에피소드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보다는 은밀함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옳다, 비록 틀렸다 할지라도.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선다. 희생이나 기도보다도.
사랑은 최상의 덕목이며 지상의 것은 사라지고 천상의 것으로
가득 채우기에 사랑은 우리를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유럽에서 감정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된 것은 12세기 쯤 부터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대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우리 몰래 육체를 거스르면서 올라 오르는 것이다.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고 과시가
되어 히스테리가 되고 만다.
사랑의 보물(사랑하는자)과 침상의 보물(섹스하는 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유럽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들은 성교 밖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클레브 공작부인의 이야기, 폴과 비르지니, 프로망태 소설에서 도미니크가 그렇다.
빅토리아 드 함순 이야기,피에르와 루스 이야기, 로맹 롤랑의 등장인물도 그렇다.
"백치"에서 도스토엡스키는 나스타샤 필립포프나로 하여금 선착순으로 상인과
동침하게 하지만 진짜 열정적이었을 땐 그녀는 설탕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성교와의 사랑 그것은 불길 위의 냄비다. 비등점에 이른 감정은 열정으로
변하여 뚜껑을 튀어 오르게 하고 미친듯이 춤추게 한다.
대부분 유럽의 사랑 개념은 성교 밖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20세기에 성이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새로운 의미는 없었으며
오히려 마법적으로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느꼈던, 도미니크가
낙마할 뻔 했던 바로 그런 상황에 이른다.
일생의 한 사람은 자축해야 할 일이지만 인생이 너무 짧아서
대부분은 절대 자기의 사람을 찾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라고 "아라공"이 말했다.
문학은 곧 사라진다.
러시아의 문학은 기독교적이기는 하지만 중세 스콜라철학의 합리론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르네상스도 겪지 않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 유럽의 양대지주다.
프랑스는 감정이 형태로만 남은 늙고 지친 나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보다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야말로 모든 생물이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다.
사유에 의해서는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고통이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자신과 홀로 남게 된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다.
눈물이란 허영심에 관한 속된 진실이다.
괴테는 눈물에 의문을 품어보았지만 한 번도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눈물이 너무나, 너무나 자주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생겨났다고 했다.
감정의 변화란 의아할 정도로 빠르다.
음악 그것은 영혼을 부풀리는 펌프다.
어떤 명분을 위하고 역사의 모터를 돌리는 힘은 "이상 팽창된 영혼"이다.
수학적 관점에서 볼때 아름다움이란 견본품이 원형과 가장 흡사할 때 이다.
정해진 값의 중간지점은 아름답기는 해도 단조롭다.
단조로운 아름다움에서 비개별적 비개인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인권이란 개념의 절정적 시기는 20세기 70년대 후반이다.
솔제니친이 공산 러시아에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던 때다.
턱수염을 기르고 수갑을 찬 이 비범한 인물이 서양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덕분에 인권이라는 표현은 모든 욕구가 권리라는 일종의 에너지가 되어 버렸다.
노략질을 하며 처형 장면을 회상하는 집단이 오르가슴에 빠지는 그 건달패들과
한 테이블에 앉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건달패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건달패야말로 바로 혁명적 증오의 도구다.
자살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존재 밑바닥에 심겨 있는 것으로서 때가
되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움터 올라 검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험한 계곡을 걷는 인간이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더 이상 견뎌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당했다고 생각 되는 부당한 처사들은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남은 건 분노 때문에 망가져 버린 가느다란 목소리 하나뿐인데
약했기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런 공격들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약자는 나쁜 일을 당했을 때도 그것을 남들처럼 남에게 전가할 힘도 없고,
그런 자신의 허약함이 또 자신을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리치며 대들고 싶지만 그럴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의 허약함을 파괴하려면 자신이 파괴되어져야 하는
죽음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무엇하나 만족할만한 것은 없으며 짐짝같은 자신이 몹시 싫어진다.
그래도 던져 버리지 못하면 그런 자신을 지고 다니며 세상을 잃어 간다.
여기서 세상이란 아주 작은 메아리에도 답을 하고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우주의 어느 한 부분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유일하게 동참할 수 있는 세계는 어린 강아지의 죽음에서 느끼는
슬픔의 세계뿐이다. 우리라는 것과는 상관없는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고통 속에 갇혀 살면서 일생 동안 친한 친구 한 명 없다는 건 정말 슬픈일이다.
자기 영혼 외에 다른 것은 없으니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모험의 끝에 파르마 수도원에 은둔했다. 라는 파브리스의 말로 끝을 맺는
스탕달의 소설이 있다. 수도원, 이곳은 세상과 인간을 등진 곳이다.
예전에는 세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세상 고락을 멀리 하는
사람들의 수도원이었으나, 세상과 불화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오늘 날은 파브리스가 은신했던 그런 수도원이 없다.
성적 금기는 청교도적인 것이다.
수줍음이란 우리가 지키는 것을 남이 원할 때에 느끼는 감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킨다는 의미다. 한 때 매우 매력적이며 대담하게 성관계를
주도했던 그들은 내 영혼에 자극적인 사진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성적으로 전혀 주도할 줄 모르던 여자들, 비밀스러웠던 여자들에게 더 끌린다.
섹스에 몰두한다는 것은 뜨겁게 불타는 단말마의 고통에 비유할 수 있다.
열심히 종말을 향해 달리지만 고대하는 종말은 자꾸만 자꾸만 빠져 나간다.
얼굴을 붉히는 여자는 아름답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 아니며
더는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지 못하고 육체의 처분에 맡겨지게 되는 상태다.
이미지는 그 뒤에서 숨을 수도 빠져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그런 이미지가 아니다.
자신의 진짜 이미지와 다르게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가치다.
세심한 배려는 오히려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멍청이들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이려는 것보다 쓸데없는 짓도 없다.
사람의 본질은 은유에서만 포착할 수 있다.
웃음
대리석상의 얼굴이 케네디 얼굴처럼 웃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남성미의
전형인 다비드상을 본다면 아마도 멍청이처럼 보일 것이다.
모나리자의 웃음 역시 그렇다.
고대에서 앵그르에 이르기까지 미소는 형상화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 조각의 얼굴들의 미소는 하나의 표정, 즉 영원한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의 지속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악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의 평정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 웃음이다.
즉 타락은 웃음이다.
웃음과 미소가 없는 얼굴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얼굴은 사유의 현존을 반영할 때 아름다운데 웃음은 그 사유가 없는 순간이다.
우스운 것을 본 그 순간까지는 우습지 않았는데 그 직후에 오는 신체의
발작이 웃음이다. 웃음은 얼굴의 발작이며 발작은 통제를 받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도 이성도 아닌 뭔가에 의해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이다.
웃음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표정이라 한다면 그것은 얼굴의 가지 각색의
표정을 지닌 상태의 부동성에서만 가능하다.
웃음의 발작 상태에서는 모두가 비슷해 진다.
피로에 지친 이상한 미소는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유머도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줄 알 때 가능하다.
어떤 세계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 세계를 통째로 유희대상으로
삼거나 아니면 그저 장난감 정도로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