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무라카미 하루키
우주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이데아가 우월한 점은 타고난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이데아는 타인에게 인식됨으로써 비로소 성립하고 나름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물론 그 형태도 빌려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타인의 인식이 없다면 이데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데아는 타인의 인식자체가 에너지의 원천이다.
사람이 생각을 멈추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멈추겠다는 자체도 생각이기에 생각하기를 멈추려면
그걸 멈추려는 생각자체를 멈춰야 한다.
돌고래는 좌우 뇌를 따로 잠들게 할 수 있지만 이데아에 관심이 없는 탓에 진화도 멈췄다.
인간의 뇌는 한덩어리이기 때문에 일단 이데아가 생겨나면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다.
이데아는 기생충처럼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받아서 존재를 유지한다.
인간의 의지가 일시적으로 만들어 낸 어떤 형체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마지막 순간 가장 애착이 남은 곳을 찾아간다고 한다.
사람이 뭔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떤 특수한 채널을 통해서 현실이
비현실이 되거나 비현실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캬비엩 엠톨" (caveat emptor) 의 원리에따른다.
즉 "매수자 위험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손에 잡히는 확실한 현실이다.
믿고 기댈 수 있는 탄탄한 지면같은 것 말이다.
어떤 순간 자신이 "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T.S. 엘리엇이 말한 "빈 부분을 지푸라기로 채운 인간"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굶주림보다 더 절실한 현실은 없다.
피가 흐르는 진흙에 불과한 인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어도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의 몸은 죽기 전 육체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특수한 물질을 분비한다.
그런 작용이 있어야 큰 고통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둘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식이 혼미한 채로 고통없이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한다.
이데아는 사람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각자의 운명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연관성의 산물인 것이다.
훌륭한 메타포는 모든 현상에 감춰진 가능성의 줄기를 드러내게 한다.
최고의 메타포는 최고의 시가 될 수 있다.
마음이 멋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둔다면 '이중 메티포'의 먹이가 된다.
이중 메타포는 우리 안의 깊은 어둠 안에 있으며 우리의 올바른 생각을 붙들어
하나하나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려 나가면서 심연을 만든다.
메타포는 마음 속의 어두은 심연이다.
마음이란 기억 속에 있으며 이미지를 먹으며 살아간다.
논리적인 근거 같은 것도 없이 그저 그래야한다고 사람은 느낄 때가 있다.
형태를 지닌 것들에게 시간은 위대한 존재다.
불필요한 요소는 내 안으로 일절 끌어들이지 않는다.
&♥&
초상화 작가인 "나" 는 아내의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상실감에 빠져
혼자 낡은 자동차로 추운 한 계절을 여행을 하며 보낸다.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가 예전에 그림을 그리며 살던 산 속에 있는 집에 임시 거주하게된다.
그 사이 일주일에 두 번 미술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13세의 특이한 소녀와 만나게 된다.
고액을 제의하며 초상화를 의뢰하는 "멘시키"라는 중년의 남자는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는
남자로서 내가 있는 집 건너편의 저택에서 혼자살고 있다.
13세 소녀가 사는 집은 멘시키의 집 건너편에 있다.
나는 수강생인 한 여인과 정기적인 만남을 즐긴다.
돌아가신 친구의 아버지는 난징대학살과 관련이 있는 심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 사람은 화가이었으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려 이 집에 감춰놓았고 나는 우연히 그 그림을 발견한다.
그림의 내용은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의 한 장면이다.
나는 멘시키의 주문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주인공은 예의 그 소녀다.
내가 소녀를 그리는 동안 멘시키와 소녀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갖게 된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그림 속의 인물 중 이데아의 현현인 기사단장과
메타포의 전이의 상징인 긴 얼굴을 만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소녀가 사라지고 소녀의 행방을 찾아 나서게 된 나는 현실같은
비현실 상황에 놓이며 죽음직전의 공포에 까지 빠지지만 결국 이 과정들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미묘한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고 나는
비현실적인 방법을 통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소녀도 집으로 돌아와
있게 되면서 흥미진진한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후 나는 이혼직전까지 갔던 아내와 다시 결합하게 되고 이데아와 메타포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믿는 아이를 낳고 다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