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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가는가이다.
"히피아스여 아름다움이 뭔가."
"아름다운 여자가 아름답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이란 자신과 같이 아름다운 말을 구사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며 즐기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맛있는 것은 맛있다고 얘기를 하면서 먹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심포지움은 같이 술 마시며 이야기하기다.
플라토닉 사랑은 에로스에서 시작한다.
파이드로스의 사랑은 받는 쪽(어린)과 하는 쪽(연상)으로 나뉜다.
사랑은 나뉨으로 불완전해 진 반쪽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뉘어진 후로 그들은 결혼을 거듭하며 본래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버렸기에 애처로움이 되어버린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자체로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고로 사랑은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않다.
아가톤은 타자가 필요 없는 사랑을 말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파네스
사랑과는 정 반대인 사랑으로서 자폐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페니아(가난의 신)와 포로스(풍요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다.
에로스는 신도 인간도 아닌 다이몬이다.
또한 에로스는 양극단 즉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풍족과 빈곤,
앎과 무지의 중간에 있다.
물은 마시기 위해, 아름다움은 향유하기 위해서 갈망한다.
아름다움과 행복 추구의 에너지 화, 우리는 이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순간순간 죽어가고 있는 존재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으며,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몸을 남기고, 정신적인 갈망인 예술작품을
창조한 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호와도 7일간 창조를 끝낸 후 보기에 좋았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을 아는 것이 지혜의 마지막이다.
인간의 눈을 통해 보여 지는 나를 보면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애인이며 장래가 촉망되는 아테네의 정치가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전혀 아니었으나 그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성교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없다며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거절한다.
미남 알키비아데스는 사랑을 구걸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고 추남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받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되고 싶으나 될 수 없는 자신의 못남을 비탄하게 되며
훗날 도덕심이 없는 능력자는 조국을 배신하게 되고 암살을 당한다.
알키비아데스처럼 완전한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향유할 자격이 없음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러나 굴하지 말자.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는 순간 막가는 인생이 된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 자체가 없어진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답을 알고 있다는 기준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몸이 도취되면 정신도 도취된다.
보다 큰 이성이 몸이다.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
- 이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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