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미널(일본 영화)Movie 2018. 7. 21. 21:26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외로운 일이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이던 여자.
이 여자의 애인은 유부남이며 직업은 판사이고 말 수가 적은 편이다.
어느 날 역에서 전차를 기다리던 두 사람, 여자는 남자에게로 슬며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가 달려오고 있는 선로 위로 몸을 날린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낼 수 없었다는 자괴감과 충격에 빠져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만다.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국선 변호사를 자처하고
한적한 지방으로 내려 와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간다.
살아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사는 그런 삶.
대체로 일본인들의 인간미 없어 보이는 거리두기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원하지 않지만 가족조차도 두어야 할 거리는 분명히 있다.
집을 떠나 몇 십 년간 가족과 소식을 끊고 사는 그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었다.
그러나 밀착된 관계에서 오는 폐혜나 아픔도 현실에서는 의외로 많다.
이런 현실은 서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치명적인 슬픔으로 남게 한다.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독보해야만 하는 숙명은
천륜이나 인륜보다 더 핵심적이고 냉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혼자 가야만 하는 끝 없이 외로운 길.
개체로서 존중되어지려면 경제적인 자립은 필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경제적인 짐이 되어버린 여인의
섬뜩하면서도 섬세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싫다.
감동은 처음 한 번 뿐이라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에서 흩날리는
눈발은 겨울마다 다르면서도 같은 감동을 우리에게 준다.
차가운 속성을 지닌 눈이 지닌 부드러움 때문이리라.
두 남녀는 깊어가는 겨울 밤 가로등 밑을 그렇게 따스하게 걸었다.
연인처럼. 문득 생각나면 달려가 볼 수 있는 장소를 하나쯤 마음에 두고
있다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달려가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살인적인 외로움을 온 몸으로 지고 독보하는 인간이기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란 인구 수 만큼이나 다양한 삶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지나고 보면 어떤 삶이든 모든 삶은 아름답고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는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먹고 마실 때보다 더한 행복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조건 없이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은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지워주신 유일한 의무인지도 모른다.
그것 없이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에 말이다.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 무얼 하든지 "나는 너 때문에 너는 나 때문에"
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좋겠다.
혼자 남게 된 남자의 자발적인 구속으로 인한 제한 된 삶에서도 하나의 답을 본다.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지탱해 줄 소중한 것들을 스스로에게서
이끌어 내는 삶의 태도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 훌륭함이 아닐까.
세상과 멀어져 무미건조해 보이는 그 삶에도 지켜야할 규범이라도 있는 듯 단정하다.
삶의 태도가 곧 철학이라 했다.
어느 날 자신이 변호를 해 주었던 젊은 여인이 감사하다는 인사차 집으로
찾아왔다. 남자는 상냥하고 예의 바른 여자에게 시종일관 사무적으로 대한다.
여인은 사랑스럽고 예의바르고 다정하다.
가끔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함께 식사도 하게 되며 가까워진다.
그녀의 아픈 가족사도 알게 되어 남자는 소소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저 냉냉하다.
여인은 떠나게 되고 남자는 다시 혼자 남겨진다.
그녀가 떠나고 난 빈자리에서 남자는 자신이 따뜻해지는 어떤 감정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것은 외롭지 않을 그 무엇이다.
여인이 지펴놓고 간 온기다.
남자의 일상이 조금씩 따뜻해져 간다.
문득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마음도 바꾸기로 한다.
20여년이 넘도록 소식조차 없던 아들로부터 결혼 청첩장을 받았을 때
자신은 참석할 수 없다고 했었던 결혼식이다.
남자는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여운을 남기고 간 여인을 생각한다.
잠들어 있던 삶의 에너지가 내면에서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여인을 찾아 나설 것 같다.
인간은 무엇에 의해 바뀌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사는가.
진정한 사랑은 병든 마음을 치유한다.
2018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