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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과 하나님Note 2013. 8. 12. 10:41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아름다움에는 숨은 가시가 있다.
가시란 치열한 투쟁이며 쉽게 도달 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피를 흘리는
리얼리티이며 신비이며 기쁨이며 동시에 아주 끔찍한 것이다.
미는 신과 악마가 싸우는 현장이며 또한 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이다.
유명한 작가들 중에 정상적인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심연이 있어서 그곳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하니까 거기에 심연이 있는 것이다.
막대의 한 쪽이 내려가면 다른 한 쪽이 올라가듯이 추락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
인간 내면의 한 쪽이 타락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하나님을 찾는다.
때문에 상처가 없는 사람에게는 가망이라는 것이 없다.
인간의 내면에는 추락하는 힘과 하늘로 향하려하는 힘이 동시에 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최고의 가치다.
후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막스의 과학적 공산주의 보다 더 과학적이었다.
후리에 써클 “페트라쉐프스키”는 후리에 사상을 쫓는 독서회의 회원들이었
으나 정부가 이들을 반정부혐의로 가두었다.
이들에 대한 총살 15분 직전에 왕으로부터 회유하는 사면을 받는
사건이 있었으나 그들의 지성은 왕에 동조하지 않았다.
프로콩트라(프로거버먼트- 친 정부, 꽁프 거버먼트-반 정부)
더럽기로 유명한 도스토엡스키의 원고에서 사람은 약한 것이라는 흔적을본다.
자신은 인간도 아니라며 절규 하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도박 따위의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도스토옙스키와 발자끄가 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상처 많은 영혼을 통해 본 현실의 표현이 예술이다.
범생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망가진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돈과 육체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곳에 반드시 예수님이 계신다.
버려진 부류를 끌어 안아주는 것이 상식이 된 예수가 우리들의 구제다.
인간 아버지가 만든 육체에 하나님은 영혼을 만들어 주셨다.
상징적인 정의 믿음 사랑 따위는 믿지 않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리얼리스트이다.
더럽고 추악한 인간성으로 가득 찬 카라마조프가야말로 하나님의 진선미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다 괜찮다 하는 인간들이 대중이다.
창녀 '그루센카'의 영혼 속에 있는 인간의 마지막 순결을 발견하면서 알료샤는
먼저 인간의 아픔을 서로 나눠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평생 못 된 짓만 하던 여자가 거지에게 파 뿌리 하나를 먹을 것으로 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죽어 지옥으로 갔고 이 파 뿌리 하나의 선행이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 수 있는 은총의
계기가 되어 그 파뿌리를 잡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자기 다리를 잡으려는 다른 사람들을
발로 차 버림으로써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알료샤는 파뿌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녀 그루센카에게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본다.
그러나 세속적인 인간들을 대변해 줄 기적과 이목은 내세에 대한 신비와 벌을 내릴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
만약 예수에게 이러한 권위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가시고 천 육백년(소설 속에서)
이나 지난 지금은 예수님에게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을 사람이 없다.
세속적 인간들은 거짓 신비와 기적으로 대중들을 끌고 왔는데 지금 진짜예수가 나타나는 것은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에 따라 종교이름으로 이단 심문과 마녀 사냥이라는 단죄로 지금까지 견뎌왔다.
불행해 보지 않은 신앙은 공짜이며 거기에는 가시의 과정이 빠져 있다.
예수님의 금식이 40일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40년 광야생활의 시련을 상징한다.
40일 간의 금식으로 주린 배를 채워 주겠다는 마귀가 제안한 빵(경제)대신에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늘의 빵으로 예수는 시험을 물리쳤다.
탑에서 뛰어 내리고도 사는 구원자의 기적을 보이라는 마귀의 말도 무시했다.
악마에게 한 번 절하면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추상적인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빵이다.
우리들은 이미 네(예수)가 아니라 빵과 기적과 권세의 편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비밀이라고 수사 알료샤와 성인 소시마는 말한다.
예수님이 거절하신 세 가지 유혹에 인간 모두는 예스라고 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 속에는 황금이 같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왜 지금 나타나서 대중에게 혼란을 주느냐는 대심문관의 추궁에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대 심문관의 고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예수님께서 반박하며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토로했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니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은 자는 진정한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빵 보다 아픔을 먼저 나누라.
부모와 사랑하는 자에게 빵 때문에 배신을 일삼는 부류가 우리들이다.
이반이 쓴 극시에서의 결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어 내는 힘이 있지 않는가." 그 힘은 카라마조프다운 저속한 힘이다.
더럽게 살아 온 저속한 힘이 있기에 구원을 받는다.
속세는 자유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자유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자유라는 이름으로 받는 예속과 그에 따른 자기 상실이다.
속세의 주장은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채우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명문의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증대시키는데 힘쓰라.
이것이 속세의 가르침이다.
이곳에 바로 그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아진 권리에서 생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부자에게는 고립과 정신적 자멸, 가난한 자에게는 부러움과 살인이 생겼다.
권리는 주어졌어도 욕망을 채울 올바른 수단은 없다.
필요에 대한 수단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가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며 포도주가 떨어졌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섯 동이의 물로 술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가나는 가난한 곳이며 가장 세속 된 곳이다.
포도주의 기적은 가난한 자들의 순수한 기쁨을 계속 누리게 하신 것이다.
달리다쿰과 오병이어와 마찬가지로 가나의 포도주의 기적도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 이룬 부활의 기적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기적들은 기적이 아닌 것이다.
성인이라 굳게 믿었던 스승 조시마의 시체가 썩는 사실에 엘료샤는 믿음에큰 혼란이 온다.
그 당시 성인은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다.
엘료샤는 꿈을 꾼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인 조시마와 잔치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엘료샤를 향해 '파 뿌리' 라고 외치며 엘료샤를 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교회의 폭력을 생각해 보라.
성서 읽는 것만 바르게 바꿔도 교회가 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신학은 성서에서 주는 것을 주지 못한다.
유대인 600만 명이 죽는데 침묵하신 예수님을 말해야 하며 패역함에 동조한 지식인을 고발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짓는 죄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레비나스 신앙'- 버림받은 자를 본 자는 그 순간 이미 짐을 지게 된 것이다.
나무가 겨울에 기쁨과 추위로 떨고 있었다.
살아있기 때문에 떨었고 봄이 오는 믿음으로 떨고 있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자가 불렀을 때 누군가가 대답하는 것이 삶의 공간이다.
동면 생물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동굴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불변하는 신앙 속에 살기를 원한다.
내일 해가 뜬다는 사실, 내일 내가 아침에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이렇게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에 조시마는 사랑하는 사제 '엘료샤'에게 세속으로 돌아가기를 조언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거짓말 잘 하고 도박을 즐겼던 약한 사람이었기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쓸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의 진실을 메시지로 전달하지 않으면 결국 이 땅의 거짓 된 빵과 권력에게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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